"나는 종교평화주의자입니다"

박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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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8. 25. 13:42

개운사 불상 훼손 사건

 2016년 1월 17일, 밤 10시 30분쯤 경북 김천에 위치한 불교 사찰 개운사에 60대 남성이 나타나 난동을 부렸다. 그는 각종 불상을 바닥에 내던지고 목탁과 촛불을 마구 부수기 시작했다. 곧장 경비업체 직원과 개운사 주지 진원 스님이 나타났고, 난동을 멈춘 그는 이렇게 외쳤다.

"절도 성당도 미신이고 우상이다. 그래서 없애고 불 질러야 한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이후 남성은 출동한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도 계속해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개운사 주지 진원스님은 참담한 마음을 페이스북에 토로했고,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 듣게 된 어떤 개신교인은 그녀를 돕기 위해 모금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목사이면서 서울기독대학교 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손원영 교수였다. 그는 같은 개신교인으로서 불교계에 사과를 표하고, 개운사의 재건을 위해 모금 운동을 진행했다. 이는 종교 평화의 사례로서 각종 언론을 통해 미담으로 전해졌다.

미담이 파면 사유로 둔갑하다

 그러나 아름다운 이야기는 여기까지. 개운사 불상 훼손 사건이 발생하고 1년 여가 지난 2017년 2월 17일, 서울기독대학교는 이사회를 열고 손 교수를 '성실 의무 위반'을 이유로 파면 처분한다. '성실 의무 위반'이란 무엇일까? 학교 측은 손 교수가 개신교에서는 허용하지 않고 있는 '우상 숭배'에 해당하는 죄를 저질렀다고 밝혔다. 모금 운동을 통해 모인 자금이 다시 개운사의 불상을 만드는 데 들어갈 텐데 이는 간접적으로나마 불상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에 우상 숭배에 해당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것은, 손 교수가 주도하여 모인 약 260만 원의 모금액은 개운사 측에서 정중하게 거절하여 종교 평화를 위한 대화 모임에 전액 기부되었다는 것이다. 즉, 실제 모금된 금액은 정작 불상 재건에 쓰이지도 않은 것이다.

 손 교수는 이전에도 학교 측과 여러 마찰을 겪었던 것 같았다. 미담이 파면 사유로 등장한 것은 누가 봐도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더욱 궁금해졌다. 손 교수와 학교 사이의 마찰은 크게 두 번 있었다.

 손 교수는 2014년에 학교로부터 첫 징계를 받았다. 손 교수의 종파는 감리교이고 서울기독대학교의 종파는 그리스도의교회로, 같은 개신교이지만 교단이 서로 달랐다. 학교 측은 15년 넘게 재직했던 손 교수에게 교단 변경을 요구했다. 손 교수는 승낙했으나 학교의 요구 사항은 점점 늘어났다. 교단 변경을 위한 모든 과정을 마쳤지만, 학교는 뜬금없이 아내의 침례에 대해서도 문제 삼았다. 아내가 침례 받지 않는다면 교단 변경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끝내 손 교수는 학교의 요구를 거부했고 정직 2개월의 처분을 받았다.

 징계를 받지는 않았지만 학교의 눈엣가시가 된 결정적 사건도 있었다. 2009년 서울기독대학교는 공시지가 8억 원 짜리 은평뉴타운 부지를 50억 원에 매입했다. 그러나 이는 서울기독대학교 이강평 총장이 불법으로 지출한 것이었고, 교육부의 환수 명령을 받게 된다. 6년이 지난 2015년까지도 50억 원이 환수되지 않자 교육부는 대학구조개혁평가에서 이를 감점 요인으로 지적하며 서울기독대학교에 최하 등급인 E등급을 부여했다. 학내에서는 총장 퇴진 운동이 벌어졌고 손 교수는 총장 비판에 앞장섰던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에서 활동했다. 공교롭게도 손 교수와 비대위에서 퇴진 운동을 함께 했던 교수 5명은 재임용에서 탈락하거나 해임됐다.

 손원영 교수는 학교 측의 부당한 처분과 관련한 파면 처분 무효 확인 소송 1심과 2심에서 모두 승소했고, 학교 재단인 환원학원이 상고하지 않아 최종 승소했다. 마침내 2020년 4월 1일, 환원학원 이사회는 손원영 교수에 대한 복직을 결정했다. 올해 6월에는 법원이 학교 측이 손 교수의 강의나 연구실 출입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며 '방해 금지 가처분'을 인용하여 또다시 손 교수의 손을 들어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손 교수는 학교의 반대로 인해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서울기독대학교 1층에서 복직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오랜 싸움을 이어온 그를 8월 19일, 서울기독대학교 로비에서 만날 수 있었다.

서울기독대학교 전경. 손원영 교수는 대학 본관 로비에서 1인 시위를 진행 중이었다.

(필자 : 진한 글씨, 손원영 교수 : 연한 글씨)

먼저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자기소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서울기독대학교 신학과 교수이고요. 제 전공은 기독교교육학입니다. 요즘에는 또 종교 교육 쪽에 관심이 많고요. 1999년도에 제가 우리 학교 교수가 됐으니까, 벌써 23년째.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네요.

이렇게 본관에서 계속해서 시위하고 계신 이유, 2016년도 일을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교수님께서 2016년 개운사 훼불 사건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모금 운동도 하시고 사과문도 올리신 걸로 알고 있는데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신다면요.

 제 기억으로는 2016년 1월 17일인가로 알고 있는데, 그날 이제 김천 개운사에 광신도로 보이는 한 중년 남성 개신교인이 법당에 들어가서 "불상은 다 우상이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불당을 훼손했고요. 또 당시 주지스님이 비구니 스님이셨는데, 그분에게 "지옥에 가라"라고 하면서 행패를 부렸죠. 그래 가지고 재산 피해가 1억 5천 정도 났다고 하고 스님은 이제 정신 치료도 받고요. 그런 이야기가 언론에 올라왔어요. 페이스북에도 올라오고요. 나는 페이스북을 통해 뉴스를 접했죠. 접하고 나서 참 황당했어요. 같은 개신교인으로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그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충격을 받았죠.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되는데' 생각하면서 며칠이 지났어요. 2~3일 정도? 그냥 안타까운 마음만 가지고요. 그런데 그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두 번째 놀라웠던 거는 그 사건이 벌어진 것을 두고 기독교에서 너무나 조용했다는 거예요. 훼불한 자체도 나쁜 거지만, 제게 더 충격이었던 것은 기독교와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공적인 조직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조직에서 너무 조용했다는 게 나로서는 참 충격이었어요.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그래서 이제 제가 제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니까 제 페이스북에 불자들에게, 개운사 신도 분들에게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미안하다는 얘기를 했던 거고. 원래 불당이 그렇게 다 훼손됐으니까 원래 모습으로 복구해야 하는데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주변 몇 분들하고 모금 운동을 했죠. 그리고 나서 모금 운동 과정에서 세 번째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사과하고 모금 운동한 것에 대해서 총장을 비롯해서 우리 학교에 있는 소위 리더들이 "우상 숭배를 했다", "이단이다" 이런 식으로 나를 매도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또 충격을 받은 거죠.

사실 당시 언론에서 종교 사이의 화해라든지 미담의 사례로 알려진 걸로 알고 있는데,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 거네요.

 그러니까요. 그게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고. 그 연장선상에 지금까지 있는거죠. 우리 학교의 모습이 지금까지 크게 바뀐 것도 아닌 것 같고, 또 우리 한국 개신교의 이런 (실망스러운) 모습이 벌써 한 5년, 6년 됐잖아요. 물론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 하는 여론의 분위기가 많이 생긴 건 사실인 것 같아요. 그런데 여전히 많은 개신교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후에 법원의 판단을 받으셨는데, 파면 취소 결정도 나왔고 학교 법인에서도 재임용하라고까지 결론이 나왔는데 총장 측에서 받아들이지 않은 거잖아요.

 네, 그렇죠.

최근에는 또 업무방해금지에 대한 가처분 항고심에서 승소도 하셨고요. 결국 아무리 개신교 재단을 기반으로 한 미션 스쿨이라고 하더라도 교육법에 의거해서 교수님의 파면이나 임용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이념이나 성향을 가지고 판단했기 때문에 법원에서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 결정한 건데요. 잇따른 판결이 있었음에도 교수님의 원직 복직에 대한 학교 측의 움직임은 없는 건가요?

 그게 사실은 난센스죠. 우리 학교가 어떤 개인의 이익 집단도 아니고요. 또 그냥 임의로 모인 임의 단체가 아니잖아요. 대한민국의 법에 의해서 운영이 되는 대학이고. 그렇다면 교육법이 됐든 상위의 헌법이 됐든, 법에 의해서 운영되는 조직인데 법을 안 따르고 있는 게 황당한 거죠. 물론 학교 측 입장에서는 변명거리가 있어요. 뭐냐면 "아직 소송이 덜 끝났다"라는 거예요. 소송이 덜 끝났기 때문에 끝날 때까지 자기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얘기거든요. 물론 그럴 수도 있다고 봐요. 그러니까 제가 지금 이렇게 있는 거고요. 문제는 이제 파면 무효라는 게 최종적으로 확정이 됐고요.

 그 다음에 사립대학은 대체적으로 보면 법인 이사회라는 게 있어요. 학교를 운영하는 운영 주체거든요. 운영 주체인 이사회에서 교수들의 임면권을 갖고 있다고요. 그래서 제가 절차에 의해서 정상적으로 교수 임용을 받고 복직이 됐으면 그걸 따라줘야 하는데 총장이 그걸 안 따라준 거죠. 나로서는 어이 상실이에요. 말이 안 되는 것이거든요. 여기서의 고집은 그거예요. 자기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 자기들하고 생각이 다르다고 하는 것을 핑계로 해서 소송이 안 끝났다고 하는 거죠. 그럼 소송이 안 끝나면 계속 이렇게 있어야 하나? 말이 안 되잖아요. 일단 해놓고, 법에 의해서 복직을 시켜놓고 법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그렇게 하는 거지. 우리 학교에도 문제가 많고, 사법부도 일을 빨리빨리 안 하고 일을 천천히 진행하니까 그것도 하나의 빌미를 주는 거고요. 교육부는 총장이 문제가 있어도 총장 해임을 못해요. 이사회에서 총장에 대해서 경고하는 메시지를 보냈는데도, 이사회에서 총장을 해임하지 못하고 징계를 못해요. 이사회 말을 안 듣는 상황이면 당연히 총장은 징계감이거든요. 우리 학교의 웃기는 상황은 이사회 내부에 분규가 있어요. 그래 가지고 이사회가 모이질 못해요. 그러니까 총장이 뭘 잘못하고 행정을 잘못해도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런 구조적인 어려움 속에 제가 있기 때문에 해결이 안 되고 이렇게 하고 있는 거죠. 방법은 교육부에서 임시 이사가 나와서 이사회가 정상적으로 운영이 되고 또 학교 행정을 잘못하면 이사회에서 학교 행정 책임자를 문책하기도 하고 이래야 되겠죠. 절차가 있으니까, 시간이 걸리는 것 아닌가 생각해요.

이전에도 교수님께서 학교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자주 내셨더라고요. 2011년 서울기독대학교 은평구 땅 매입 논란이 있었을 때 1인 시위를 하셨고, 2014년에는 침례를 거부하셔서 정직을 당하기도 하셨어요. 나서시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거나 행동하셨던 이유가 있을까요.

 제가 자주 낸 것도 아닌데요.(웃음) 몇 번 냈는데 그게 크게 확산된 거고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대학에 있는 교수든 학교의 교사가 됐든 교직자는 사람이 완전한 존재는 아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한계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강조해서 가르치는 것하고 실제 살아가는 것하고 비슷하게 가려고 노력하잖아요. 그래도 우리 대학의 명색이 기독교 대학이거든요, 작지만. 기독교 대학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정신에 따라서 살아보자' 이렇게 생각하면서 가르치는 사람들이 저희인데, 학교의 중요한 일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이 우리 학교 설립 이념하고는 정반대의 길로 간다고 할 때 그걸 가만히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결정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나. 제가 자주 한 것도 아니고요.(웃음) 평상시에는 조용해요. 정말 나쁜 짓 한 것에 대해서 이건 아니지 않느냐고 이의제기를 한 거죠. 그런데 그걸 못 받아주는 거고요. 아쉽죠, 그게. 그래도 대학은 지성인, 지식인들의 공동체라고 한다면 결국 지식인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가능하면 거짓은 배제하고 옳은 길을 찾아가야 하는데, 옳은 길을 찾기 위해서는 갈등도 있을 수 있고요. 대화하고, 또 잠정적으로 합의하기가 어려우면 보류하고 기다리기도 하면서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노력을 많이 해야 하는데 너무 독선적이니까요. 자기들 생각만 옳다고 하고 다른 목소리에 대해서는 완전히 죄악시하고, 악마화하는 거죠. 이거는 현대 지식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서울기독대학교의 교훈 "성서로 돌아가자!" 이는 학교법인이 속해 있는 그리스도의교회가 주창하는 '환원 운동'의 대표적 표어다. 손원영 교수는 복직이 되어 진정한 환원 운동에 앞장서고 싶다고 밝혔다.


교수님도 목사님이시잖아요. 학교 법인도 결국 그리스도의교회라는 개신교 교단에 소속되어 있고요. 교수님께서는 개운사 모금 운동이야말로 예수님의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하셨고, 그동안 학교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과 괴리되는 사건마다 목소리를 냈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정작 학교 역시도 교수님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이 담겼다고 하는 성경을 기반으로 교수님이 잘못됐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서로 돌아가자"라는 교훈을 외치면서요. 같은 개신교에 속해 있고, 성경이라는 출발점도 같은데 드러나는 것에 있어서 이렇게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아주 좋은 질문 하셨어요. 그게 말하자면 일종의 패러다임의 전환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나도 기독교인이고 총장도 기독교인이고, 여기 있는 분들(학교 구성원)도 다 같은데. 왜 그러느냐? 결국 이제 패러다임이 바뀌어가는 상황에서 저분들은 옛 패러다임에 안주해있는 경우이고, 저는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패러다임으로 우리 학교가 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하는 그런 취지이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똑같지만 그런 데에서 많이 다른 게 아닌가. 예를 들면, 기독교의 패러다임이 여러 번 바뀌었잖아요. 기독교 초창기에는, 로마 때에는 박해받는 종교였잖아요. 그러다가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이제는 기독교가 국가 종교가 됐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완전히, 완전히 다른 거거든요. 박해받는 종교에서 박해하는 종교가 되어버린 거예요. 이게 어떻게 보면 제1 패러다임으로 볼 수 있어요. 큰 전환인 거죠. 그래서 한 천 년 이상 중세 기간 동안에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고, 안 믿으면 다 처벌받고 하는 그런 패러다임이에요. 그러다 보니 부패하고 썩고, 그게 가톨릭교회의 부패상으로 나왔던 거고요.

 그래서 또 다른 형태의 패러다임이 온 거죠. 이건 아니지 않느냐, "예수의 정신은 그게 아니고 제국의 종교와는 동일시될 수 없다", "성경의 예수의 정신으로 다시 회복하자"라고 했던 것이 종교 개혁이잖아요. 루터의 종교개혁.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때 당시 또 다른 형태의 패러다임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온 거죠. 그런데 500년이 지나고 나서 개신교를 보니까 루터가 그렇게 초대교회의 본래의 모습, 예수님의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새로운 패러다임 운동을 했는데 중세 때 그 가톨릭교회보다 더 부패한 거예요. 중세 때는요, 꼭대기만 썩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개신교가 위에는 말할 것도 없고 밑에까지 다 썩은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지금 완전히 우리 학교도 마찬가지이고 돈의 논리에 의해서 다 운영이 되는 거예요. 이런 얘기하기 좀 뭐하지만, 공공연하게 성직 매매를 한다든지, 교수직 매매를 한다든지. 심심치 않게요. 우리 학교가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요, 우리 한국이 지금 그렇다는 거예요. 사립대학 모습이, 또 우리 한국 교회 모습이. 성직 매매, 중세 때 그렇게 심했던 성직 매매가 지금은 더 일상화됐어요. 그리고 당시 성직자들이 부자라고 하잖아요. 지금은요, 교회가 얼마나 부자인지 몰라요. 헌금 받아서 땅 사고 투기하고, 세습하고. 아까우니까 세습하게 되고. 그러니까 '바벨론 포로'라는 표현이 있거든요. 아주 오래전, 주전(기원전) 6세기경에, 유다가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해서 유다의 지도자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이 있어요. 그때 바벨론 포로와 같이, 지금 교회가 자본주의의 포로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건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인 거죠. 특히 남녀차별의 문제라든지, 기후위기의 문제라든지. 또 지금 국가 간의 장벽이 거의 없어졌잖아요. 원하는 나라 다 갈 수 있잖아요. 그리고 같이 가서 살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과 공존해야 하잖아요. 종교가 다를 수도 있고, 심지어 종교가 아예 없는 사람이 더 많을 때도 있고요. 이렇게 생각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데 루터 당시만 하더라도요, 과정은 그 당시에는 훌륭했지만 500년이 지난 지금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는 거예요. 상황이 바뀐 거예요. 그 당시에는 남녀차별이 정당화됐던 때고 기후위기는 아예 없었던 거고, 종교 간의 갈등은 기독교 내부에서의 갈등이지 다른 종교와의 관계는 그렇게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잖아요. 물론 이슬람은 좀 예외이긴 하지만. 500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 하고 다른 패러다임이 요구가 되는 거죠.

 정리하면, 교회가 자본주의의 포로가 된 상황, 시대적인 이슈들, 남녀차별의 문제, 환경 파괴의 문제, 다문화 사회의 문제 등 이런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요, 500년 전 패러다임을 가지고는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소위 말하면 새로운 기독교 운동이 필요한 거죠. 저는 그런 점에서 예수의 정신을 새롭게 해석해야 하지 않느냐 주장하는 입장이죠. 왜냐하면 교수니까, 교수는 또 끊임없이 우리 시대의 문제와 씨름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런 맥락에서 남녀평등 해야 한다고 주장해요. 그런데 우리 학교는 평등하지 않거든요. 여성 안수직* 안 줘요. 기후 위기 이야기하지만, 별로 기후 위기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이웃 종교와 무종교인들이 정말 넘쳐나는데 그걸 이단이라고 해요, 이단이 뭔지도 모르면서. 이웃 종교에 대해 우상이라고 적대시해요. 그리고 생각이 조금만 다르면 이단이라고 하고 정죄**하고요. 우리 총장은 20년 넘게 총장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전횡을 하는 거예요, 학교를. 이런 상황에서 최소한 저는 학자로서 기독교인으로서 고민이 늘 있는 거죠.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노력해야 하지 않나, 그래서 패러다임 사이의 갈등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하루아침에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이건 역사의 흐름이기 때문에 막을 수가 없어요. 막으면 그건 뒤처지는 거예요. 나는 이 학교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시대에 영합***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 시대에서 책임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 안수직 : 목사나 장로, 안수집사 등의 직분.
** 정죄 : 죄가 있다고 단정하는 것.
*** 영합 :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며 좇는 것.


생각해보면 과거에는 종교의 사회적 역할이 강조될 때도 있었고, 당장 80년대 90년대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던 시기만 보더라도 종교가 먼저 약자를 보호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런 게 많이 약화가 된 것 같아요.

 맞아요, 맞아요.

개운사 모금 운동 이외에도, 크리스마스에 열린선원이라는 사찰에서 설교를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교수님의 활동을 종합해보면, 다른 종교가 서로 대화하고 교류하는 '종교 평화 운동'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종교 평화'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한데, 조금 설명을 해주신다면요.

 '종교 평화 운동'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 학문적인 선이해가 필요해요. 우리 신학에는 여러 분야가 있는데, 소위 선교학이라는 분야가 있어요.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그 복음과 관련된 학문적인 노력을 일컬어 선교학이라고 부르는 거죠. 선교학에서 주장하는 선교 접근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배타주의적 접근 방법이 있어요. 사실은 어떻게 보면 지난 2000년 동안 아마 지배적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특히 과거보다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를 만들잖아요. 만들기 전에 선교사들을 파송해놓고 복음을 전한다고 해놓고 그 뒤에 총 들고 가는 거예요. 그리고 장사하는 식으로 하는 거죠. 처음에는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문화를 완전히 황폐화시키는 그런 일들을 많이 했죠. 물론 우리 한국은 서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본에 의해 식민지가 됐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피부에 덜 와닿아요. 하지만 중국이라든지 필리핀이라든지 거의 대부분의 식민지 국가들은 서구 열강으로부터, 특히 기독교 열강으로부터의 식민지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정말 그게 굉장히 피부로 와닿는 거죠. 이 사람들은 와가지고 상대방의 문화, 타자의 문화를 없애는 거예요. 요즘 탈레반이 어찌 보면 비슷한 거죠. 불상은 우상이라고 해서 때려 부수고, 우리나라 전통적인 무교 같은 거 미신이니까 없애야 한다면서 없애기도 하고, 그런 거죠. 일종의 소위 말하는 제국주의적 선교 방식인 거예요. "내 것은 옳고 네 것은 틀렸다"라는 거죠. 정복해야 하고 없애야 하고, 그래서 저 사람, 타자를 자기화하는 거예요. 굉장히 폭력적일 수 있죠. 이게 첫 번째 방식이에요. 유감스럽게도 기독교 2천 년 역사의 상당 부분이 이 영향 가운데 있었어요. 원래 성경의 정신은 그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의 일이다 보니.(웃음)

어찌 보면 그게 당연한 것처럼 지금까지도 받아들여졌죠.

 그게 이제 첫 번째 방식이고, 두 번째 방식은 이것하고는 정반대가 있는데요. 이건 아주 극단적인 상대주의의 방식이에요. 특히 이건 민주사회가 되면서 "너도 옳고 나도 옳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대로 기독교를, 종교를 이해하는 방식에 적용이 되는 거예요. 불교도 옳고, 기독교도 옳고. 또 옳은 정도가 아니고 똑같다는 거죠. 말하자면 종교 다원주의라고 이야기를 하죠. 비난하는 사람들은 혼합주의라고도 하고요. 극단적인 상대주의인 거죠. 이건 철저하게 선교를 굳이 할 필요도 없다는 거예요. 두 번째 입장이라고 볼 수 있죠. 어떻게 보면 일반인들이 아마 거기에 많이 호응할지 모르겠어요. "아이 종교 다 똑같지 뭐" 이런 태도인 거죠.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것도 문제가 많은 거예요. 어떻게 사람의 생각이 똑같을 수 있어요. 다 다르지. 난 그렇게 생각해요. 같잖더라고요, 공부를 하면 할수록. 신학 공부, 종교학 공부를 하면 할수록 '다른 거지', '나는 나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 (두 번째 방식은) 굉장히 무책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세 번째는 뭐냐면 이게 어떻게 보면 저의 입장인데 포괄주의라고 해요. 포괄주의는 뭐냐면 유사성이 굉장히 많지만, 다름도 굉장히 많다고 인정을 하는 거예요.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있을 수 있고 하지만 다름을 존중하면서 서로 대화하자는 거예요. 최소한 대화를 하다보면 대화하는 동안에는 안 싸워요. 말을 하고 들어야 하니까요. 저는 그런 점에서 종교평화주의자예요. 이건 기독교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니까 다른 종교에서 보면 이것도 '기독교 우월주의'의 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그건 어느 종교에서든지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이 들어요. 포괄주의는 다른 말로 하면 대화주의라고도 말할 수 있어요. 근데 나는 이게 성경의 정신하고 제일 맞다고 보는 거죠. 성경을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려고 아테네를 갔거든요. 아테네는 신전들이 많잖아요. 신전들이 많잖아요. 로마신이 얼마나 많아요. 그러면서 그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해요. "우상이니까 다 없애시오"라고 하는 게 아니라, "당신들이 참 종교성이 많다. 그런데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신이라는 것을 믿고 하는데, 내가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그 신을 너희에게 소개해주겠다"라고요. 그 신이 알고 보니 성경의 하나님이라는 이야기인 거죠.

사도행전 17장 22절~23절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 아레오바고 : ‘아레스(Ares)의 언덕’이란 뜻. 아덴의 유명한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위치한 높이 115m의 석회암 언덕
** 아덴 : 고대 헬라 도시 국가 연맹 중 하나였던 앗티카의 수도이며 현대 그리스의 수도


 그리고 예수님도 그런 비슷한 말씀을 하신 것이,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말하자면 여기에 율법에 해당되는 게 이웃종교가 다 그런 것일 수 있는 거예요. 한국에 종교들이 많잖아요. 유교도 있고, 불교도 있고, 샤머니즘이라고 하는 무교도 있고 요즘에는 이슬람도 있고 여러 종교가 함께 공존하는데, 적어도 포괄주의적 입장에 서있으면 불교나 유교를 기독교가 폐하는 게 아니에요. 그걸 하나의 율법으로 보기 때문에 그것과 대화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배우는 거예요. 불교가 완전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유교도 마찬가지잖아요. 내가 아무리 유교 신봉자라 하더라도 "유교가 완전하다", "다른 건 필요 없다" 그렇게는 안 할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기독교 입장에서 복음이 그 유교의 부족한 점, 불교의 부족한 점을 완성하고 보완하는 그런 존재가 되게 하고 싶은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는 말씀, 그런 점에서 포괄주의로 보고 있고요. 포괄주의가 최소한 종교평화주의하고 비슷하지 않나. 이것에 대해 제가 깊이 있게 글을 쓰진 않았어요. 그런데 이제 질문하셨으니까 해명을 하는 거고요. 사람들한테 가끔 가다 그런 이야기를 해요.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다름을 통해서 상대방도 나를 보며 배울 수 있잖아요. 왜냐하면 완전한 존재가 아니니까요. 또 역사적 종교로서 기독교도 얼마나 부족한 게 많아요, 나쁜 짓도 많이 했고. 그런데 이웃 종교를 통해 배우거든요. 기독교가 이렇게 호전적인데, 불교 같은 경우를 보면 기독교의 사랑 이상으로 불교의 자비가 대단하다고 생각이 많이 들어요. 보복을 잘 안 하더라고요. 나는 당장 한 대 맞으면 때릴 생각부터 하는데, 그분들은 맞으면 무슨 인연이 있겠지 이러면서.(웃음)

* 율법 : 개신교 성경에서 신·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의 생활과 행위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 전체


통계를 살펴보면 개신교인에 의해 일어난 훼불 사건이 24년 간 400건이 넘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요. 보복을 안 해. 그건 진짜 예수님 정신에 가까운 게 아닌가.(웃음) 내가 그런 얘기를 했더니 불교 편을 든다고 또 그러더라고요. 그걸 떠나서, 팩트를 얘기하는 거죠. 그래서 나는 종교평화주의자라고 이야기하죠. 서로 대화하고 대화를 통해서 나도 성숙해지고 다른 사람도 나를 통해서 배우고요. 스님들도 나하고 대화하게 되면 내가 아무래도 기독교에 대해서 그분들보다는 많이 알 테니까 기독교의 이야기와 좀 더 가까워지는 거 아니에요. 결국 기독교의 진리에 가까워지는 것일 수도 있고요. 저는 그런 게 선교 아닌가 생각을 하는 거죠. 대화가 곧 선교인 거죠. 상대방에게 내 생각을 강요해서 내 가치관으로 변화시키는 게 선교가 아니고요.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세 번째 포괄주의를 따른다면, 과연 그 사람들도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재미난 것은요, 다른 종교는 구원이라는 말이 없어요. 그건 기독교 용어예요. 다시 말하면 그 사람들은 구원에 관심이 없어요. 머리 구조 자체가 구원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불교에 무슨 구원이 있어요. 없어요, 해탈이지. 해탈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거든요. 고통을 겪고 있을 때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거예요. 글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라고 보면 구원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기독교적 랭귀지(language)지 불교 랭귀지(language)는 적어도 아닌 거죠. 저는 굳이 이야기 한다면, 다른 종교에 구원이 있느냐? 아이 돈 노!(I don't know) 다만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구원이 그들에게 있느냐고 물으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명시적으로 보면 성경에 보면 예수 믿어야 구원 받는다고 하니까, 적어도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 예수 믿으니까 다 구원 받았다고 합시다. 그렇지만 예수 안 믿는 다른 종교인들, 다 지옥 갔느냐? 성경에 다른 종교인들이 지옥 갔다는 말이 없어요. 오히려 사도 바울이 기독교에서 아주 중요한 초대 선교사인데, 로마서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구원 받느냐고 했을 때 그 사람의 양심으로 받는다는 거예요. 스님이 됐든 교회를 안 다니든 상관 없이, 그 사람이 삶을 정말 양심껏 살았다면요. 예를 들면 도둑질하지 않고 거짓말 하지 않으면 양심에 따라 구원 받는다고 하거든요. 나는 그 양심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문제지, 내가 저 사람이 절에 다니니까 다 지옥 간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내가 무슨 하나님이에요? 저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다만 양심이라고 하는 것도 완전한 게 아니니까 예수 믿으라고 이야기 하는 거죠. 그렇지만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는 거죠. 일종의 양심 운동을 하는 거죠. 근데 교회를 다니면서 비양심적으로 산다? 그건 아닌 것 같아요.(웃음) 우린 다 그런 점에서 죄인이죠. 어떻게 100% 훌륭해요. 부족한 건 인정하고, 그게 오히려 기독교적 양심인 거죠. 근데 내 주장만 옳고 "너는 틀렸다", "너는 지옥가야 한다" 이거는 아닌 거죠.

손원영 교수가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교수님께서 가나안 교회도 개척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말씀하셨듯이 최근 들어 교회가 세를 불리거나 확장하는 데만 몰두하고, 자본주의를 지나치게 신봉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교수님의 가나안 교회는 찾아보니까 교회 건물도 없고, 기존 개신교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문제도 많이 다루시더라고요. 과학과 종교의 관계라든지, 예술 신학이라든지요. 소개를 해주신다면요. ('가나안'은 성경에 등장하는 지명이기도 하지만, '안나가'를 거꾸로 읽어도 '가나안'이다. 최근 들어 크리스천이지만 교회에는 나가지 않는 사람들을 '가나안 신자'라고 부른다.)

 이제 학교 밖으로 나와가지고 뭘 해야 할까 고민을 하다가 목사니까, 교회를 돌봐야겠다는 1차적인 책임이 있었던 거고요. 두 번째는 마침 그 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였어요.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 도대체 종교 개혁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그런 이야기, 한국 교회 상황이 좋은 상황이 아니라서 제도권 교회가 갖고 있는 문제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심지어 2017년 기준으로 200만 명이 가나안 신자라는 거예요. 교회 '안나가', '안나가'의 거꾸로가 '가나안'이죠. 적어도 천만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천만도 안 되지만요. 천만이라고 치면 20%잖아요. 20%가 가나안 신자인 거예요. 이건 굉장히 쇼킹한 얘기거든요. 근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사람들이 제도권 교회를 비판하면서 나와서 가나안 신자가 되는데, 그 사람들이 믿음이 떨어져서 교회 밖으로 뛰쳐나온 게 아닌 거예요. 오히려 믿음이 더 좋아.(웃음) 그래서 우리 가나안 교회 오는 사람들은 만나면요, 진짜 저보다 신앙에 대한 열정과 지식이 많아요. 그리고 교회의 높은 위치에서 교회를 이끌었던 평신도 지도자들이 많은 거예요. 이것은 아까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 이야기를 했지만 기존의 패러다임에 적응하지 못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일군의 기독교인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교회가 많은데, 제가 똑같은 교회를 할 필요가 없는 거잖아요. (교회가) 너무 많은데 그 많은 교회 하나 더 늘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제가 그래서 관심 갖는 것은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데, 이 패러다임에 부합하는 교회 공동체가 없기 때문에 이 공동체를 제 역량이라고 하는 범위 내에서 한 번 해보고자 했던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남녀차별 문제에서 조금 더 전향적으로 평등한 공동체, 또 이웃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으로 폭력적으로 다가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 다름을 존중하면서 서로를 통해 배우는 공동체, 말하자면 종교 대화인 거죠. 또 기독교는 진화론을 믿으면 안 되고 창조론 믿어야 하기 때문에 "진화론은 지옥 간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그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해요. 수많은 과학자들이 증명하거든요. 근데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친단 말이에요. 심지어 대학에서도. 이건 눈을 가리는 거예요. 말이 안 되는 거거든요. 현대 과학에 적어도 열린 자세로 고민하고 새로운 기독교 문화를 창조하려고 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 '스팀'이라고 제가 부르고 있어요. 현대 과학의 열린 공동체라고 하는 거죠. 그다음에 종교심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그 종교심을 계발하기 위해서 명상을 강조하는 영성 수행의 공동체라는 특징이 있고요. 또 인문학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인문학의 꽃은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도 있겠지만 예술이거든요. 그런데 예술은 유감스럽게도 교회에서는 부차적인 거였어요. 음악 같은 경우에는 좋았지만, 미술이나 건축이나 이런 것들은 개신교에서는 거의.

성상 문제가 있어서 터부시하는 게 있었죠.

 터부시하고 그랬죠. 근데 그것도 잘못된 게 아닌가. 요즘 그런 연구물들이 많이 나와요. 그런 것들을 어떻게 끌어들여서 함께 기독교 신앙을 높일까. 그래서 그걸 통해서 사람들이 가나안이 됐지만, 자기들 나름대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도록 좀 도와야겠다 해서 가나안 공동체를 만든 거예요. 이것도 완전한 게 아니기 때문에 작년까지는 6개월에 한 번씩이었는데, 1년에 한 번씩 해체해요. 그리고 다시 시작하고, 뭐 건물도 없고요. 목사들 월급도 없고, 헌금은 받아요, 받는데 본인이 선교하겠다고 쓰면 100% 돌려주고, 자유롭죠. 시대에 부합하는 기독교 공동체를 만드는 운동을 하고 있죠. 관심 있는 사람들 오라고 선전 좀 해주세요.(웃음)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 어떤 목회자, 종교인이 되고 싶으신지.

 글쎄요. 저는 거창한 건 잘 모르겠고요. 기독교인은 영어로 크리스천(Christian)이잖아요. 크라이스트(Christ)를 따라가는 사람이에요,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 다시 말하면 작은 그리스도가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우리 각자의 기독교인은 작은 그리스도가 되는 거예요. 그럼 그리스도가 뭘 하는 사람이냐. 사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한 일을 보면 아는 게,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일을 하신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인 거예요. 어원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이런 게 많이 있는데 그건 그냥 의미상 그런 거고요. 실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이 땅에 오셔서 한 일은 하나님 나라를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한 거예요. 그럼 하나님 나라가 뭐냐 하면 정의롭고, 정말 사람들이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롭고, 마음껏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헌신하고, 서로 사랑하고,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고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났는데 태어난 이곳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깨닫고 삶의 보람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일체의 활동이 있는 곳을 일컬어 하나님의 나라다, 이렇게 풀어서 설명할 수 있거든요. 그렇다면 답이 나온 거죠. 종교를 비즈니스로 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요. 사람들 호주머니 터는 것에 관심이 많거든요. 그리고 내가 무슨 감투를 써서 명예를 얻을까에 관심이 많거든요. 그러니까 중세 때 그걸 하기 위해서 내세 프로젝트를 한 거예요. 천국에 가기 위해서 "헌금 내라", "면죄부를 사라" 이거죠. 근데 지금도 똑같아요. 그거는 종교가 아니에요, 그냥 교회의 이름을 붙인 비즈니스죠.

 그래서 나는 내가 얼마나 더 살지, 교수 생활 얼마나 더 할지 모르겠는데, 그리고 제가 또 잘할 자신도 없지만, 제가 바라는 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젓가락 하나 더 얹혀 놓는 거죠.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가 지금보다는 조금 더 정의로운 공동체가 되길 바라고, 사랑과 평화가 있고, 행복감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길 바라고요. 그걸 위해서 제가 조금 참여한다면, 저는 이제 만족한 거죠. 그게 다예요. 같이 하나님 나라 운동에 목사니까, 기독교인이니까. 목사라고 해서 특별한 것도 아니고 그걸 조금 더 열심히 하겠노라고 다짐한 사람이니까요. 학교 안이나 밖에 있는 많은 분들이 그런 뜻으로 저를 응원해주시는 게 아닌가 생각을 해서 응원해주시는 분들한테 고맙죠. 사실 저도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5~6년 싸우다 보니까 힘들더라고요. 힘든데, 그래도 뜻을 같이 하는 분들이 있으니까요. 용기를 내게 되고요. 우리 학생 분도 이렇게 오셔가지고 서로 대화도 하고 이런 것들이 이렇게 연대감을 가지고 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같아요. 또 하나님 나라가 꼭 죽어야 가는 곳이 아니잖아요. 여기서부터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일궈나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종교 평화

 다소 생소했던 '종교 평화'는 이번 인터뷰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개념이 아닐까 싶다. 서울기독대학교 본부와 총장은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교리와 맞지 않는 활동을 벌인 손원영 교수를 파면했고, 여전히 정상적인 교직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그러나 학교는 교육법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 학교 운영에 있어 현행법을 초월한 특정 종교의 교리나 신념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학교에서는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고, 의견이 서로 대립한다면 치열한 토론이 진행되어야 한다. 특정 사상이나 주장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방식은 다원화된 사회에서 자유에 대한 분출 의지를 견뎌낼 수도 없을 것이다. 정체성을 지킨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타자를 억압한다면 진보는 더뎌질 것이며, 이는 우리 사회 전체에 불행한 일이다. 같은 종교에서도 '종교 평화'는 필요하다.

 특정 종교 내부의 갈등부터 종교와 종교 사이의 갈등까지, 종교계에는 다양한 차원의 갈등 상황이 존재한다. 이러한 갈등의 대부분은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데서 출발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강요하고 억압하려고 한다. 결국 대화만이 해결 방법이다. 우리는 종교를 통해 고뇌를 해소하고 삶에 대한 통찰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현대 종교가 걸맞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오히려 사회 분열을 초래하고 있지는 않은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종교 평화 운동에 더욱 감사하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안식처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손원영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